검은 고양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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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는 2019년 3월 22일에 태어났다. 봄이라고는 하나 막 태어난 아기고양이가 아무렇지 않을 정도의 기온은 아니었다. 긴 시간에 걸쳐 네 마리를 낳은 어미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고 가장 늦게 태어난 그래는 투명막만 간신히 벗겨진 채 방치되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곧 죽어버릴 것 같은 새끼까지 살필 여력이 라지에게는 없었다.

그래를 갈색 휴지에 싸서 집으로 들고 올라와 헤어드라이어로 말렸다. 물기를 말리고 체온을 올려야 살 수 있다. 축축하던 털이 마르고 보송보송해지면서 체온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따뜻해지자 그래는 빽빽 거세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짜증이든 역정이든 생존 다음에는 감정이 온다.

4월 1일 아기고양이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고, 2주쯤 지나 라지는 다섯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거처를 옮겼다. 내 발소리를 듣고 달려올 수 있는 정도의 거리, 옆집이었다. 눈을 뜨면서 호기심과 모험심이 폭발한 아기고양이들이 병아리처럼 삐약삐약 울어대서 민원이 나올까봐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평온한 봄날이었다.

5월에 접어들자 라지는 새끼들에게 점프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사방이 벽과 담으로 둘러싸인 곳에 새끼를 한 마리씩 물어다 놓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무섭다면 어떻게든 담장 위로 뛰어올라야 한다. 용기, 재능, 끈기 뭐 그런 것들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태어난 지 2개월이 채 안 된 아기고양이들이다. 일단 운다. 그래는 다섯 중에 가장 날렵했고, 삼월은 가장 잘 울었다.

5월 7일. 민원으로 출동한 유기동물보호소 직원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그래는 혼자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평소보다 일찍 밥을 주러 나갔다가 장면을 목격한 나는 남은 네 마리의 새끼고양이를 되찾기 위해 울음을 터뜨렸다. 삼월이처럼. 붉은 색 원피스에 큼지막한 금장신구를 잔뜩 걸친 아주머니의 윽박질이 끝없이 계속되자 나는 조금 지쳤던 모양이다. 울어서 국면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빠른 방법이기는 했다.

처음 겪은 엄청난 일에 놀란 라지는 나머지 새끼들을 데리고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한 빈집을 골라 무성한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해가 지면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그래를 찾아다니는 라지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며칠이 지나 멈췄다. 그래를 찾은 것이다. 고양이들에게 또다시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봐 나는 여름 내내 고양이들 뒤를 쫒아다니며 고군분투했다. 주차장에 나와 놀다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어두워질 때까지 파수를 서기도 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을 났다.

12월이 되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다. 어떤 밤은 영하 4도, 어떤 아침에는 따가울 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라 라지를 비롯하여 다른 형제들은 상자집에 모여 지내는데 그래만 일주일 넘게 보이지 않았다. 전염병이 돌아 고양이들이 여럿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을 마침 동네 약사로부터 듣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를 작고 왜소한 그래가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그래의 신상에 변동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따뜻한 토요일 오후, 그래는 돌아왔다. 그릇에 사료를 채우고 돌아보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뚱한 얼굴을 하고, 무뚝뚝하게. 죽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너무 놀란 나는 엉덩방아를 찔 뻔했다. 반가움에 덥석 손을 내밀었지만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냐는 얼굴로 그래는 평소처럼 얼른 뒤로 물러나 앉았다.

2019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