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해서

공부를 마치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의 온도가 낮아진다. 그것은 아마도 울고 싶은 기분일 텐데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지만 대개는 그 시간쯤 되면 시간도 힘도 이미 여분이 없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고 이틀이 쌓이고 열흘이 쌓인다.




Shooting of The Misfits, Reno, Nevada, USA, 1960 / Cornell Capa


중학교 때 화실(이라고 쓰지만 미술학원)에 두 달간 다닌 적이 있다. 아마 내 생애 유일하게 다닌 학원이지 싶다. 참 행복했었으므로 겨우 두 달이었지만 그 화실의 풍경과 시간을 나는 비교적 꼼꼼하게 기억한다. 학교가 끝나면 화실에 가서 횟집 테이블 같은 큰 탁자에 앉아 큰 종이 한 장을 꺼내 조용히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완성되면 원장 선생님이 그림을 보고 고쳐야 할 부분과 잘한 부분을 말해 준다. 과연 돈 주고 배우는 것이어서인지, 선생님이 훌륭한 것인지, 선생님은 언제나 나의 실수와 헛점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나미도 나와 같은 화실을 다녔다. 당연하다. 내가 미술반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 화실에 다니게 된 것도 모두 미술 선생님의 권유였으니까. 나미는 이름만큼 얼굴이 예쁘지는 않았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하던 가수 나미처럼 뾰족하고 새침한 얼굴에 길쭉하고 가느다란 애였다. 얼핏 봐도 부잣집 딸. 그게 나미였다. 그런데 나미는 왜 그림을 그리는 걸까. 미술 선생님도 화실 선생님도 나미 그림을 볼 때마다 얼굴이 어두워지던데... 하긴 나미가 그린 그림을 보면 나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Girl in Fairground Caravan, 1926-1932 / August Sander


모두들 나에게 물었다. 왜 화실에서 미술실에서 그리던 것처럼 못 그리느냐고. 대회에 나가면 나미는 1등을 했고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끄트머리 몇 등을 간신히 했다. 2시간 30분.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요. 그 소리를 들으며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가...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1시간 넘게 그저 앉아만 있다가 마지못해 간신히 서둘러 해치우듯 그리고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말할 수는 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London, UK, 2005 / Edouard Boubat


나는 곧 가망 없는 아이가 되었고 당연히 화실씩이나 다닐 필요는 없어졌다. 미술 선생님은 나에게 학교가 끝나면 이제 OO여고 미술부에 가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윤민식이 있을 거라고. 윤민식에게 가서 배우라고.



2017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