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이었던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침묵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끝없이 지저귀니까. 국민학교 교실에 가본 적 있니. 교실 뒤편 벽에 보면 이런 저런 표어나 급훈들이 붙어 있었지. 생각해보면 그중에 가장 흔했던 건 언제나 정숙이었어.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 뒤에야 깨닫았지. 몇 년 뒤 중학교에 올라오니까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고 하더군. 그건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어. 참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자율학습 시간에 혼자 학교 옥상에 올라가 눈을 감고 뛰어내렸었던 기억이 나. 대학에 들어오면 그래서 진짜 조용해. 살아남은 아이들은 영어책을 들고 중앙 도서관으로 갔지. 침묵의 카르텔 같은 거야. 나중에 군대에 가면 다시 강제로 똑같은 말들을 지껄이게 하고 입에서 거품을 물 때까지 뛰어다니라고 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지. 침묵에 관한 이야기였던가.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침묵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 나는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거야. 순결한 아름다움은 왜 슬픔에 닿아 있는가라는 이야기. 그리하여 아름다움의 끝은 왜 언제나 죽음인가라는 것. 괜찮아. 듣고 싶지 않으면 리모컨을 꺼도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이젠 신물이 나니까. 그런데 군대를 갔다 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아니. 그 다음에는 텔레비전이 대신 떠들어줘. 근사하지.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해. 너는 어때.
 


 
중국집에서 저녁에 짜장면을 먹고 있는데 꼬마 하나가 밖에서 놀다가 물을 먹으러 뛰어 들어온다. 아줌마가 저녁은 먹었냐고 물으니까 꼬마가 말한다. 엄마 아직 안 왔어요ㅡ
 
꼬마야, 아직이 아니라 엄마는 영원히 오지 않는단다.
 


 
백이십만 원이 남은 통장 잔액을 확인한 뒤 이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진다. ECM. 유러피안 컨템포러리 뮤직. 이런 게 컨템포러리인 세상이 있을까. 그리프는 왜 그녀를 기다리지 못했을까. 내가 떠난 뒤에도 그녀는 나를 기다렸을까.
 


 
베네딕트 수도원의 그레고리안 성가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시작된 미사 음악의 한 갈래입니다. 머리 깎은 납승들이 예불 시간에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고딕 버전이라고 짐작하시면 무난합니다. 분위기도 좋은데 우리 선문답이나 하나 할까요.
 
옛날 중국에 스님이 하나 있었는데 조주라고 아주 유명한 선사였습니다. 하루는 새까만 신참 하나가 와서 조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스님, 저는 불법에 귀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불법인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조주, 물끄러미 이마에 칼주름 모으더니 이 기특한 신참을 한참 노려보다 문득 묻습니다.
너, 아침은 먹었냐?
네? 네… 두 그릇.
그래… 그럼 가서 그릇을 씻으렴.
 


 
포르투갈의 5인조 파두 그룹 마드리듀쉬입니다. 평소 파두를 듣느니 차라리 뽕짝을 듣겠다던 검열위도 흔쾌히 동의했다고 합니다. 마블에서는 미모의 여성 보컬이라면 일단 기립부터 하고 봅니다. 수년 간의 협의 끝에 마침내 마블에 입당하게 된 마드리듀쉬의 보컬 테레사 살구에이로는 검열위 전원의 가열찬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기자들만 없었으면 파도타기까지 했을 텐데… 괜히 불렀습니다.
 

NOTICE

FM is from Minorblue, not from me.

Christoper Street Repair Shop, 1948 I Berenice Abbott

4개에 만 원

아이유의 제제를 해석적·예술적 자유라고 말한다.

나는 뭐랄까 예술이 자주 좀 가엾다. 사람들은 자극적이면, 예외적이면, 이상하면, 낯설면, 그런데 마침 그 사람이 유명하면 얼마든지 예술이고 스스럼없이 천재다. 관용과 상부상조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왓 어 원더풀 월드. 이제 예술은 천재처럼 편의점에서 얼마든지 구입 가능하다. 게다가 싸.

사드를 들먹거릴 수도 있겠구나. 사드는 어떠냐고. 사드도 예술 아니냐고. 사드는 예술이다. 왜냐하면 그는 필드에 섰기 때문에.

5살짜리 엄청난 신동이 있다. 그 녀석이 그 꼬마가 예술가인가. 아니다. 그 꼬마는 그 녀석은 다만 장래가 촉망되며 예술가 소질이 상당한 놈일 뿐이지 아직 예술가는 아니고 그 꼬마가 그 녀석이 하는 것도 예술은 아니다. 그 꼬마는 그 녀석은 아직 필드에 서지 않았으니까.  

예술은 필드에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어른들의 것, 최소한 사회적으로 누가 봐도 분명하게 사회적 약자인 아이, 아닌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야 아이를 보호할 수 있고, 그래야 약간의 아주 약간의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는 것 때문에 아이가 함부로 마치 벌써 버젓한 인간인 것처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인간의 품위는 간신히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아이야,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느긋하게 시간을 가지고 좀 더 자라렴. 너에게 시간을 주마 네가 자랄 수 있게. 그것이 필드의 암묵적 규칙,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지가 엉망진창으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붙어 있는 피카소의 그림은 예술이 될 수 있어도 어린아이가 아무리 피카소처럼 그린다 해도 그것은 그래서 예술이 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작년 잔혹 동시 논란 역시 나는 시를 쓴 그 아이가 아니고 그 어미와 삽화가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상상력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삽화가가 아이의 동시를 잔혹하게 구현했고, 자식의 재능에 눈 먼 어미가 굳이 밝히자면 범인이다.)

아이가 아직 예술가가 아니듯 아이는 아직 예술의 대상이 아니다. 다섯 살 아이에게 섹스 어필이라, 성적 취향이라, 예술이라. 예술적 해석적 자유라. 아이의 빤쓰와 젖병으로로밖에 표현 못하는 예술이라. 혹시 그저 네 형편없는 음식 솜씨를 가려줄 케찹 혹은 조미료인 건 아니고? 

남자들이 아이유에 대해 갖는 롤리타 판타지를 아이유가 역으로 예술로서 승화했다는 설? 하긴 단군은 곰이랑 잤다더라. 예수는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났다며. 워킹 데드냐. 저 안 마셨다니까요. 정말 안 마셨어요. 근데 제가 왜 이걸 불어야 하죠. 아 그니까 그냥 불으시라고요.      

Syracuse University, 1949 I Lisa Lar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