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에 만 원

아이유의 제제를 해석적·예술적 자유라고 말한다.

나는 뭐랄까 예술이 자주 좀 가엾다. 사람들은 자극적이면, 예외적이면, 이상하면, 낯설면, 그런데 마침 그 사람이 유명하면 얼마든지 예술이고 스스럼없이 천재다. 관용과 상부상조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왓 어 원더풀 월드. 이제 예술은 천재처럼 편의점에서 얼마든지 구입 가능하다. 게다가 싸.

사드를 들먹거릴 수도 있겠구나. 사드는 어떠냐고. 사드도 예술 아니냐고. 사드는 예술이다. 왜냐하면 그는 필드에 섰기 때문에.

5살짜리 엄청난 신동이 있다. 그 녀석이 그 꼬마가 예술가인가. 아니다. 그 꼬마는 그 녀석은 다만 장래가 촉망되며 예술가 소질이 상당한 놈일 뿐이지 아직 예술가는 아니고 그 꼬마가 그 녀석이 하는 것도 예술은 아니다. 그 꼬마는 그 녀석은 아직 필드에 서지 않았으니까.  

예술은 필드에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어른들의 것, 최소한 사회적으로 누가 봐도 분명하게 사회적 약자인 아이, 아닌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야 아이를 보호할 수 있고, 그래야 약간의 아주 약간의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는 것 때문에 아이가 함부로 마치 벌써 버젓한 인간인 것처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인간의 품위는 간신히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아이야,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느긋하게 시간을 가지고 좀 더 자라렴. 너에게 시간을 주마 네가 자랄 수 있게. 그것이 필드의 암묵적 규칙,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지가 엉망진창으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붙어 있는 피카소의 그림은 예술이 될 수 있어도 어린아이가 아무리 피카소처럼 그린다 해도 그것은 그래서 예술이 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작년 잔혹 동시 논란 역시 나는 시를 쓴 그 아이가 아니고 그 어미와 삽화가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상상력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삽화가가 아이의 동시를 잔혹하게 구현했고, 자식의 재능에 눈 먼 어미가 굳이 밝히자면 범인이다.)

아이가 아직 예술가가 아니듯 아이는 아직 예술의 대상이 아니다. 다섯 살 아이에게 섹스 어필이라, 성적 취향이라, 예술이라. 예술적 해석적 자유라. 아이의 빤쓰와 젖병으로로밖에 표현 못하는 예술이라. 혹시 그저 네 형편없는 음식 솜씨를 가려줄 케찹 혹은 조미료인 건 아니고? 

남자들이 아이유에 대해 갖는 롤리타 판타지를 아이유가 역으로 예술로서 승화했다는 설? 하긴 단군은 곰이랑 잤다더라. 예수는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났다며. 워킹 데드냐. 저 안 마셨다니까요. 정말 안 마셨어요. 근데 제가 왜 이걸 불어야 하죠. 아 그니까 그냥 불으시라고요.      

Syracuse University, 1949 I Lisa Larsen